1987년 대한민국의 역사를 뒤바꾼 6월 민주항쟁. 그 시작부터 원인, 전개, 결과까지 자세히 정리한 글을 통해 민주주의의 본질과 의미를 되짚어보세요. 빠르게 민주항쟁의 흐름을 알고 싶다면 아래 버튼을 눌러 확인하세요.
6월 민주항쟁이란 무엇인가?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대한민국 국민들이 독재 정권에 맞서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벌인 대규모 민주화 운동입니다. 이 항쟁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고, 한국 정치의 민주화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지속된 군부 정권에 대한 불신과 시민들의 누적된 불만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기점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이후 이한열 열사의 죽음까지 이어지며 항쟁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습니다.
항쟁의 주요 배경
- 군부 독재의 장기화: 전두환 정권은 5 공화국이라는 명목으로 출범했지만, 여전히 군부 중심의 권위주의적 정치가 계속되었고 국민들의 불만이 쌓였습니다.
- 직선제 요구 무시: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를 요구했지만, 정권은 간접 선거 방식인 ‘체육관 선거’를 고수하며 정치 개혁을 외면했습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 중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은 전국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언론 통제를 통해 이를 은폐하려던 정부의 태도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항쟁의 전개과정
항쟁은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단계: 분노의 시작 (1월~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면서 각계각층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와 기자회견이 이어졌습니다. 종교계, 법조계, 학생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저항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2단계: 6월 10일 국민대회
정부가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자, 국민들은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섰습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6월 10일 국민대회에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해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쳤습니다.
3단계: 전국적 확산과 이한열 열사 사건
6월 18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시위 중 최루탄을 맞고 중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대중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만들었고, 전국적으로 100만 명 이상이 거리로 나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6.29 선언과 항쟁의 결실
계속되는 시위와 여론의 압박 속에, 결국 6월 29일 당시 여당 대표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합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
- 언론 자유 보장
- 정치 활동의 자유 확대
- 양심수 석방
- 인권 개선 조치
이는 항쟁의 직접적인 성과로, 시민의 힘으로 정권의 입장을 바꾼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항쟁 이후의 변화
1987년 12월, 헌법 개정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고, 노태우가 국민의 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는 야권 분열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닌 제도적 민주주의로의 진입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역사적 의미와 현재의 교훈
6월 민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광복 이후 가장 큰 시민 저항 운동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깁니다:
- 국민의 정치 참여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 언론의 자유와 진실 보도가 중요하다.
- 시민사회가 연대할 때 권위주의를 이길 수 있다.
오늘날 촛불집회, 환경운동, 성평등 운동 등 다양한 사회적 흐름도 6월 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월 민주항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1987년의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외친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의 외침은 단순한 정치 구호가 아니라, 더 나은 삶과 정의로운 사회를 바라는 국민들의 절박한 외침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6월 민주항쟁을 기억하는 일은 단지 과거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시작입니다.
그날의 함성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신을 오늘에 이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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