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항쟁은 한국 민주주의를 지켜낸 국민들의 위대한 선택이자 행동이었습니다. 박종철 사건부터 6.29 선언까지, 그 전개와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세요. 빠르게 1987년 민주화 흐름을 이해하려면 아래 버튼을 클릭하세요.
1987년 항쟁이란?
1987년 항쟁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독재 체제에 맞서 싸운 역사적인 민주화 운동입니다. 이 항쟁은 단순한 일회성 시위가 아닌, 수십 년간 억압받아 온 자유에 대한 열망이 폭발한 순간이었습니다. 국민들은 거리로 나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항쟁의 기폭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고문을 받다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로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언론과 종교계, 학생운동권이 진실을 밝혀내면서 분노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쌓여온 분노를 한순간에 폭발시킨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정권의 배경과 국민의 분노
전두환 정권은 1980년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언론을 통제하고 간선제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1987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 채 또다시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으려는 시도를 하면서 국민적 반발을 샀습니다.
경제 성장과 교육 수준 향상으로 인해 시민들의 정치적 의식은 높아졌고,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은 각계로 확산되어 결국 전국적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시민의 힘: 전국으로 퍼진 저항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6.10 국민대회”를 선언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37개 도시에서 약 24만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명동성당은 항쟁의 심장이 되었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최루탄을 맞고도 굴하지 않고 항거했습니다. 종교계는 시위 참가자들을 보호하며 인권의 마지막 방어선을 지켰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희생과 항쟁의 분수령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은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고, 결국 7월 5일 사망하게 됩니다. 이한열의 죽음은 언론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고, 그의 영정 사진은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를 조성하며 항쟁의 강도를 더욱 끌어올렸습니다.
이후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이라는 이름으로 약 150만 명이 전국적으로 시위에 참여했고, 도시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정권은 더 이상 국민의 분노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6.29 선언: 정권의 양보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합니다. 이는 항쟁의 요구를 수용한 선언으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
-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복권
-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 국가보안법 개정 추진
- 민주 시민사회 확대 조치
이는 권력의 양보이자, 국민의 승리였습니다. 군부 독재가 아닌 국민이 만든 정치 체제의 출발점이었습니다.
1987년 대선과 그 이후
6.29 선언 후 개헌이 이루어졌고, 12월 16일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치러졌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두 야권 후보의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되었지만, 이는 국민이 처음으로 대통령을 직접 선출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민주주의는 점진적으로 제도화되었고,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정권교체를 통해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 교체가 실현됩니다.
지역별 참여와 사회 전반의 동참
1987년 항쟁은 특정 계층이나 지역의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의 대학생뿐 아니라, 부산의 노동자, 광주의 시민단체, 대구의 종교계, 전주의 상인들까지 모두 참여했습니다. 계층을 초월한 시민 연대는 민주주의 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1987년 항쟁의 문화적·사회적 파급 효과
항쟁 이후 언론 자유가 확대되었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했습니다. TV, 영화, 문학, 연극 등에서도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들이 등장했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감시 기능이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교육현장에서의 현대사 교육이 본격화되었고, 인권 감수성이 향상되면서 다양한 시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환경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1987년의 정신이 이어졌습니다.
기억해야 할 이유
1987년 항쟁은 단순히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입니다. 이 항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간접선거를 하고, 표현의 자유도 제약받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뜨거웠던 여름, 국민들이 만들어낸 변화는 지금도 우리 삶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의 시민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습니다. 투표권을 행사하고, 목소리를 내며, 사회에 참여하는 모든 행동이 1987년 항쟁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마무리
1987년 항쟁은 대한민국이 더 나은 나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국민이 있었고, 그 변화는 피와 희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1987년은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이며, 미래를 만들어가는 기준입니다. 그 정신을 기억하고, 행동하며,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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